한국 정부가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와의 8년간 국제투자분쟁(ISDS)에서 패소를 수용하기로 했다. 법무부는 9월 30일 선고된 환송중재 판정에 대해 영국 법원에 취소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고 28일 밝혔으며, 2015년 삼성물산·제일Industries 합병과 관련해 엘리엇에 지급해야 할 원금과 이자를 합쳐 약 1,530억 원 규모의 배상 책임이 확정됐다.

분쟁은 2018년 7월 엘리엇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근거로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해 합병 승인 과정에서 손실을 봤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2023년 6월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약 4,849만 달러와 지연이자 지급을 명했고, 이후 영국 법원 절차와 환송 심리를 거쳐 9월 판정에서도 정부 개입과 손실 사이의 인과관계를 다시 인정했다.

추가 소송을 포기한 이유

법무부 관계자는 관계 부처·법률대리인·외부 전문가 의견과 판정 분석, 추가 소송 비용을 종합해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지급 시기와 방식은 기재부 등과 조율 중이라며, 앞으로도 국익을 최우선으로 분쟁에 대응하겠다고 덧붙였다.

올해 초 영국 1심은 국민연금을 국가기관으로 보기 어렵다는 정부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2023년 판정 일부를 취소했지만, 환송을 맡은 중재판정부는 9월에도 정부 행위와 엘리엇 손실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이번 결정으로 2018년 ISDS 신청 이후 8년 3개월 만에 분쟁이 사실상 종결된다.

정부는 2023년 판정 직후 영국 법원에 취소 소송을 제기해 국민연금 표결 행위가 FTA상 정부 조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1심 패소와 항소심 환송 끝에 다시 패소 판정을 받았다. 법무부는 한 달간 환송 판정을 검토한 뒤 추가 소송 비용 대비 실익이 적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시장과 정책에 주는 함의

이 사건은 산업 정책과 주주 행동주의가 충돌할 때 국가 예산이 얼마나 노출될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로 꼽혀 왔다. 엘리엇의 원래 불만은 합병 비율과 연금 표결 과정이 이재용 경영권 승계를 위한 구조 조정의 일환으로 밀어붙여졌다는 점에 있었다.

28일에는 SK하이닉스의 사상 최대 실적 발표로 증시 관심이 반도체 쪽으로 쏠렸지만, 이번 배상은 여야가 예산·연금 거버넌스를 놓고 공방을 이어갈 소재가 될 수 있다. 야당은 왜 기존 취소 전략이 실패했는지, 연금 의결권 독립성을 어떻게 보장할지 추궁할 가능성이 크다.

투자자들은 한국이 산업 정책을 얼마나 강하게 방어할지 시험대로 삼아 왔다. 이번 결론은 외국계 펀드가 양자 투자협정을 통해 거액 배상을 받을 수 있음을 다시 확인시켰다. 재계 구조조정과 주권적 의사결정 사이의 긴장은 앞으로도 다른 분쟁에서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로 읽힌다.

앞으로의 절차

엘리엇 측은 별도 합의가 없으면 통상의 집행 절차를 통해 판정금 수령을 진행할 수 있다. 정부는 분할 지급 여부를 공개하지 않았으며, 납세자가 최종 부담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부담은 남는다.

엘리엇에게는 삼성 계열 구조 조정을 겨냥한 장기 캠페인의 승리다. 이재명 정부에게는 전임에서 물려받은 채무지만 집권 1기 안에 확정된 빚이라는 점에서 재정·외교 일정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법무부는 성급한 결정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내려고 했다고 밝혔다.

별도의 민사 소송으로 비용을 회수하겠다는 약속은 없어, 국고 부담은 그대로다. 엘리엇 측 변호인은 판정 집행을 위한 준비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향후 ISDS 대응 매뉴얼을 보강하겠다는 원론적 입장만 남겼다.